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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ice Recorder] 상호생성적 관계성의 시공간을 꿈꾸며

남아공에서 어떤 연구를 수행했는가?

2003년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존 쿳시라는 소설가가 있는데,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이전의 존 쿳시와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이후의 존 쿳시 작품에 나타나는 탈근대성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연구를 했다.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이후에 작품을 발표한 흑인 작가들의 텍스트를 찾아 읽는 일도 많이 했다.

영미 문학을 전공하면서 영국이나 미국이 아닌 아프리카, 그 중에서도 남아공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야말로 제도적으로 남아 있는 근대국가의 마지막 장치라고 본다. 우리나라의 국가보안법도 비슷한 성격을 지닌다. 국가보안법은 국내의 문제이지만 아파르트헤이트는 국가 차원을 넘어서는 인종적 문제이다. 나의 연구 주제인 근대성과 탈근대성과 관련하여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이후의 남아공의 모습에 대해 알고 싶었다.

얼마 전 근대적 지도자에 대한 이야기로 논란을 빚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남아공의 만델라나 움베키 같은 지도자들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그들은 근대적 지도자인가?

만델라나 움베키는 분명히 탈근대적 지도자이다. 특히 만델라는 위대한 탈근대적 지도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마하트마 간디와 같은 인물이 오히려 전형적인 근대적 지도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인도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훌륭한 지도자이지만, 남아공인들 입장에서 보면 인도 민족 밖에 모르는 간사하고 나쁜 지도자이다.

심지어 간디는 영화 〈부시맨〉으로 잘 알려진 호사족을 토벌하는 토벌군의 지원군으로 참여하기도 했고, 영국군과 이전의 백인 정권이었던 보어 정권과의 전쟁에 영국군의 상사로 인도인들을 데리고 참전하기도 했다. 이처럼 간디는 역사적으로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도구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적 지도자들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그들은 종족주의적, 집단주의적, 패거리주의적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다. 이는 엄연히 극복되어야 하고,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탈근대적 지도자이다. 바로 이런 맥락이 당시에 발표했던 글의 요지이기도 하다.

다른 지면을 통해 세계주의적 지도자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는데, 세계주의적인 지도자가 필요한 이유도 이런 맥락으로부터 도출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근대라는 게 단적으로 얘기하면 민족주의의 시대, 좀 더 정확하게는 국가주의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 국가의 이익은 타국가의 이익과 상충하기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타국가와의 경쟁을 물리치고 강해지려는 국가의 욕망은 제국주의적 욕망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이미 양차 세계대전을 통해 제국주의적 욕망을 확인했다.

그러나 지금 후기 근대에 만들어진 세계적 상황은 지역 공동체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유럽에 EU가 있듯이, 아프리카 역시 만델라 등장 이후부터 움베키 대통령 시대에 가장 집중적으로 아프리카 연합을 만드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실제로 아프리카 연합은 이미 2001년에 발족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동아시아 지역 연대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동아시아의 허브가 되자는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연설에서도 드러난 것이다. 이처럼 주변 국가들과 상호 평화의 원칙을 가지고 대립하지 않는, 이런 것이 지역연합을 토대로 한 세계주의이며 이러한 세계주의가 미래 사회로 나아가는 새로운 틀거리라고 생각한다.

세계주의적 지도자의 개념 속에는 근대적 관계성에 대한 탈피가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탈근대적 관계성은 어떤 것인지, 근대적 관계성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설명을 부탁한다.

근대적 사유를 촉발시킨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엄연히 서구, 백인, 남성에 한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비서구, 유색인, 여성은 항상 타자로서 대상화되고 주체적인 나의 성장에 수단으로서 사용되는 존재로 격하되었다. 오늘날 많은 철학자들이 ‘주체의 죽음’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실제로 그러한 개인, 이른바 독자적인 개인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서구, 비서구, 백인, 유색인, 남성, 여성이 관계성 속에서 존재한다. ‘나’는 항상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나’이다. 만일 지금 같은 시공간에 있는 ‘기자’와 ‘나’의 관계가 상호 생성적이지 않으면 나는 언제든지 그 관계를 파괴하고 또 다른 관계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단절이다.

 그런 측면에서 인간은 근대적 주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관계적 존재이고, 그 관계는 항상 생성적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근대적 사회 구성, 가부장적 가족주의나 국가주의에서 벗어나서 상호 생성적 관계를 만들 수 있도록 기존의 구조가 탈구조화되어야 한다.

정리=권두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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