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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브론테와 맹자, 한 영문학자의 가상 대담

학술기획- 서양문학과 선진유가(先秦儒家) 철학의 대화

서양의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허구적 주인공의 성품을 동양철학의 분석대상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거나 타당한 일일까? 한 영문학자의 이와 같은 호기심은 마침내 두 담론의 주인공을 가상공간으로 초대하여 대담을 시도하게 한다. 초대 손님은 19세기 영국 여류 소설가인 에밀리 브론테와 성선설로 잘 알려진 중국의 맹자 선생이다. 세 사람은 모 대학교 대학원 신문사의 소회의실에서 만나 대담을 시작한다.

한국의 영문학자: 동서양의 역사 속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신 두 분을 시공을 초월한 자리에서 만나 뵙게 되어 감개가 무량합니다. 원행에 피로하시지는 않는지요?

맹자 선생: 허허. 반갑습니다. 부족한 사람을 귀한 자리에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론테 양: 안녕하세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햇살이 너무 밝아서 눈이 부시네요.

한국의 영문학자: 제가 두 분을 이곳까지 모신 이유는 이렇습니다. 영문학을 전공한 제가 우연한 기회에좬맹자좭를 읽다가 유명 문학작품 속에 악한으로 등장하는 주인공들을 성선설을 기반으로 재고해 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대상으로 삼은 인물이 모두가 인정하는 악인인 히스클리프였어요.

브론테 양: 어머! 영광이네요.(웃음) 그런 기발한 계획의 첫 번째 대상이 되다니…

한국의 영문학자: 사실, 좀 황당한 발상 아닙니까? 그래서 작품과 이론의 당사자이신 두 분은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 여쭤보려고 이렇게 모셨습니다.

맹자 선생: 그랬군요. 어디 그럼 브론테 양께서 본인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시죠.

브론테 양: 사실, 글을 쓴 사람의 입장에서 제 작품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윤리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는 없어요. 그건 어디까지나, 저의 개인적인 경험과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해서 나온 하나의 예술적 창작물인거죠.

맹자 선생: 그런데 어쩌다가 그런 괴기스러운 작품을 쓰시게 되었을까요? 나는 그 책을 읽고 꿈에 그 히스클리프의 모습이 나타나서 아주 혼이 났답니다.(웃음)

브론테 양: 목사님이셨던 아버님을 따라 저희 가족이 살러갔던 호워드라는 마을은 원체 가난한데다가 수질도 좋지 않아서 질병률이나 사망률이 굉장히 높았어요. 게다가 사시사철 궂은 날씨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도 정상이 아닐 정도였답니다.

맹자 선생: 음… “세”가 문제였군요.

한국의 영문학자: “세”라 하시면…?

맹자 선생: 일단은 세(勢), 즉 환경이 문제 아닌가요? 사실, 제가 저의 제자인 고자와의 대화과정에서도 밝혔듯이,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성품은 본래 선한 것이에요. 하늘이 어찌 악한 인간을 일부러 이 땅에 내 보냈겠습니까?

브론테 양: 그건 맞아요. 성경에도 하나님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고, 거기에 맨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해 놓은 후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신 걸로 나와 있거든요?

   
 
   
 
맹자 선생: 하지만, 인간의 선한 성품은 아주 완벽한 모습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존재하지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유가에서 말하는 인의예지의 근거가 되는 네 가지 마음, 즉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그리고 시비지심이 있지요. 그런데, 그런 바탕을 지닌 선한 성품이 여러 가지 외부적 요인을 만나 극복하지 못하면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의 영문학자: 그럼 선생님께서는 작가 자신이 그러한 인물을 창조하게 된 데에도 비슷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맹자 선생: 언뜻 보기에는 그렇군요.

브론테 양: 아마 그 말씀이 맞을 거예요. 제가 살던 시절에는 여러 가지 악조건이 많았어요. 좋지 않은 환경에, 나름대로 지적인 욕구는 넘쳐났고… 그래서 주로 신문이나 책 혹은 아버지께서 해주신 이야기를 들으면서 육체적, 정신적 성장기를 지나왔답니다. 제한된 환경 속에서 순전히 지적인 호기심과 상상력으로 글을 쓰다보니 여러 가지 한계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구요.

한국의 영문학자: 그러고 보니 브론테 양의 작품에 대해서 폐쇄적 환경 속에서 성장한 백인 여성의 한계를 드러낸 작품이라는 평가도 있긴 하더군요. 그래서 유색인종에게는 혹독하고 백인의 후예에게는 매우 관대했다고 말이죠.

브론테 양: 제 입장에서는 그러한 기본적인 태도를 전혀 배제할 수는 없어요. 제가 살던 당시에 백인들의 유색인종에 대한 자세는 무조건적인 배타이거나 아니면 종교적 성향에 기반을 둔 무조건적인 배려, 그 둘 중 하나였거든요.

맹자 선생: 하지만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선한 성품이 있어요. 물론, 제가 말하는 선한 본성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내재하는 절대적인 성품이라기보다는 발전의 가능성과 그러한 가능성에 대한 희망에 기초한 것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한국의 영문학자: 실은 그것이 바로 제가 작품의 주인공인 히스클리프에게서 선한 성품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던 근거이자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는 어언쇼 어른이 리버풀에서 주워온 이를테면, 업둥이인 셈인데요…

맹자 선생: 그게 바로 불인지심(不人之心)의 결과인 것입니다.

브론테 양: 불인지심이라니요?

맹자 선생: 사람에게는 남이 불행해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마음이 있어요. 예를 들어 여러분이 길을 지나가던 중에 우물가에서 놀던 어린 아이가 갑자기 발을 헛디뎌서 우물에 빠지게 된 상황을 목격했다고 합시다. 여러분 중에 누구든지 달려가서 그 아이를 구해주고자 하지 않겠소? 그것이 바로 불인지심이지요. 그러니 길가에서 버려진 아이를 데려다가 자식처럼 키우고자 먼 길을 달려 고향으로 돌아온 그 마음이야말로 바로 불인지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한국의 영문학자: 근데, 작가의 입장에서 히스클리프는 정말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캐시에 대한 태도를 보면 생사를 초월한 사랑을 실천한 남자 중의 남자인 것 같기도 하고, 본인의 소망이 꺾이게 되자 대를 이어서 복수의 칼날을 갈고 감행한 것을 보면 악마중의 악마인 것 같기도 하고…

브론테 양: 저는 단지 사랑에 빠진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정신적, 육체적 경험의 상태를 적어보고 싶을 뿐이었어요.

맹자선생: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공부하고 가르쳐 온 제 입장에서는 본래의 악한 성품 보다는 선한 성품을 흐트러지게 한 내, 외부적 요인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싶군요.좬논어좭에 이르기를 “배우고 또한 익히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했거든요. 결국 사람의 선한 성품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외부적인 가르침과 내부적인 수용의 태도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브론테 양: 좀 더 상세한 설명을 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한국의 영문학자: 맹자 선생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한 번 저의 입장을 정리해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맹자선생: 그리 못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어디 말씀해 보시지요.

한국의 영문학자: 예. 어언쇼 어른의 불인지심 덕분에 워더링 하이츠까지 오게 된 히스클리프는 만일 외부적으로 선한 대접과 교육을 받고 그것을 내재적으로 잘 발달시켰더라면 소위 “호연지기”를 지닌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텐데, 자신에 대한 감정적 입장을 온전히 정리해 주지 못한 캐시에게 집착에 가까운 욕망을 갖게 되었고, 자신을 칩입자로 여기고 갖은 학대를 했던 힌들리에게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으며, 이러한 요인들은 곧 그로 하여금 선한 본심을 잃어버리는 “방심”의 상태에 이르게 했으며, 그로인해 낮에 혼란했던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는 밤이나 새벽 시간을 온전히 활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한 계획을 세우는데 바쳤기 때문에 그의 말로가 참으로 비참하게 끝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곧 맹자 선생께서 말씀하신 성선의 네 가지 타락 조건, 즉 물욕함닉, 세, 방심, 그리고 야기망 등의 요소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비슷한 처지에 놓인게 된 헤어턴의 경우 “같은 바람에 너라고 제대로 자라는지 두고 보자”라고 했던 히스클리프의 계획과는 달리, 캐더린과 넬리 등 주변 인물들의 선한 자극과 그에 대한 스스로의 긍정적인 반응을 통해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존양”과 “확충”의 단계를 거쳐 무어의 평원처럼 넓은 “호연지기”를 지닌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맹자 선생님?

맹자선생: 모름지기 사람의 삶은 관계의 삶인데, 그 관계를 위해서는 두 가지 마음이 중요하지요. 첫째는 일말의 가능성을 붙잡고서라도 양육의 끈을 놓지 않는 ‘길러줌’의 마음이요, 둘째는 모든 일의 원인을 밖에서 찾기보다는 내 안에서 찾고자 하는 “반구제기(反求諸己)”의 마음일 것입니다. 결국 히스클리프에게서 발견되지 못했던 관계적 삶의 가능성이 헤어턴에게서라도 발견되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브론테 양: 참 재미있고 감동적이군요. 열악한 환경과 넘치는 호기심, 그리고 제 삶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보고자 하는 욕망에서 만들어진 저의 작품이 이렇게 다양한 각도로 읽히고 또 교훈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에요.(웃음) 작가로서 작품의 평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발언에 대해서는 매우 유보적일 수밖에 없는 저로서도,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에 대해서는 두 분의 말씀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네요.

한국의 영문학자: 제가 두 분과 나누고 싶은 말씀이 아직도 무궁합니다만, 여러 가지 제약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서 여기서 대담을 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힘든 여정을 감당해 주신 두 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브론테 양: 오늘은 저에게도 참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무쪼록 긍정적인 평가든 부정적인 평가든 지속적인 관심을 통해서 작가로서의 생명력을 유지시켜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맹자선생: 저 자신도 저의 주장이 동서양을 아울러서 이해되고 전파되어서, 세상이 모두가 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낙원 같은 곳으로 변화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한국의 영문학자: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후학들의 연구내용이 좀 더 밀도 있고 폭넓게 존양, 확충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가시는 길이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지리적 격차와 2000년을 뛰어넘는 시간적 괴리로 인해서 대담에 참여한 철학자와 소설가 그리고 영문학 연구자 사이에 서로의 사유와 경험에 대한 완벽한 일치에 이르렀는지는 확언할 수 없었으나,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근본적인 소망에는 차이가 없음을 알 수가 있었다.

김철수 (전주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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